스테판 바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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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테판 바토리는 1576년부터 1586년까지 폴란드 국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재위한 인물이다. 그는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보이보드를 거쳐, 1575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재위 기간 동안 리보니아 전쟁에서 러시아 차르국을 상대로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으며, 외교를 통해 연방의 국력을 강화하려 노력했다. 그는 폴란드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으며, 그의 이름은 여러 기념물, 기관, 지명 등에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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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바토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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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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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533년 9월 27일 |
출생지 | 실라지솜요, 동부 헝가리 왕국 |
사망일 | 1586년 12월 12일 |
사망지 | 그로드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
매장일 | 1588년 5월 |
매장지 | 바벨 대성당, 크라쿠프 |
종교 | 로마 가톨릭교 |
통치 | |
폴란드 국왕 및 리투아니아 대공 즉위 (배우자 공동 통치) | 1576년 5월 1일 ~ 1586년 12월 12일 |
대관식 | 1576년 5월 1일, 바벨 대성당 |
트란실바니아 공작 즉위 | 1576년 ~ 1586년 |
가문 | |
왕가 | 바토리 가 |
아버지 | 솜요의 스테판 바토리 |
어머니 | 카타린 텔레그디 |
배우자 | 1576년 결혼 |
왕위 계승 | |
폴란드 국왕 및 리투아니아 대공 | 전임: 앙리 드 발루아 후임: 지그문트 3세 |
트란실바니아 공작 | 전임: 요한 지기스문트 자폴랴 후임: 지기스문트 바토리 |
이름 | |
헝가리어 | Báthory István |
폴란드어 | Stefan Batory |
리투아니아어 | Steponas Batoras Steponas-Batoras.ogg |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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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린 시절과 트란실바니아 통치
스테판 바토리는 1533년 9월 27일 솜요(현재의 Șimleu Silvaniei)의 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헝가리의 귀족 가문인 바토리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 이슈트반 8세 바토리(1534년 사망)와 어머니 카타린 텔레그디 사이의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서포여이 야노시의 강력한 지지자였으며, 합스부르크 가문의 페르디난트 1세의 왕위 계승에 반대하여 1529년 트란실바니아 보이보데 직위에 올랐으나 스테판이 태어난 다음 해에 사망했다. 스테판에게는 최소 다섯 명의 형제자매가 있었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1549년에서 1550년경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파도바 대학교에서 잠시 수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의 군대에 합류하여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참여했다. 그러나 1553년 이후 오스만 제국군에게 포로로 잡혔고, 페르디난트 1세가 몸값 지불을 거부하자 동 헝가리 왕국의 야노시 지그몬드 자폴랴를 지지하는 편으로 돌아섰다.
자폴랴의 지지자로서 스테판 바토리는 영주, 군사 지휘관,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그는 자폴랴의 헝가리 왕위 계승권을 지지했기 때문에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2세의 미움을 사 비엔나에서 2년간 가택 연금되기도 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자폴랴 궁정 내에서 신임을 잃고 그의 지위는 경쟁자인 헝가리 귀족 가스파르 베케시에게 넘어갔다. 잠시 정치에서 물러났으나 여전히 영향력을 유지하며 자폴랴의 후계자 중 한 명으로 거론되었다.
1570년 합스부르크가와 서포여이 가문이 화해하면서 야노시 지그몬드는 새로 창설된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1571년 야노시 지그몬드가 사망하자, 트란실바니아 의회는 베케시 가스파르를 후계자로 지명한 기존 약속을 파기하고 스테판 바토리를 트란실바니아 보이보데(총독)로 선출했다. 합스부르크가의 지원을 받은 베케시는 이에 반발하여 공위를 요구했으나, 스테판 바토리는 1573년까지 이어진 내전에서 승리하여 베케시를 트란실바니아에서 추방했다. 이후 그는 오스만 제국과 신성 로마 제국 사이에서 외교적 줄타기를 하며 트란실바니아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3.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국왕으로 선출
1572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국왕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왕위가 비게 되었다. 당시 연방은 유럽에서 가장 넓고 인구가 많은 국가 중 하나였다. 국왕 선출권을 가진 세임(폴란드 의회)은 1573년 선거를 통해 프랑스 왕자 앙리(Henryk Walezy)를 새 국왕으로 선출했다. 앙리는 선왕의 누이이자 유일한 왕위 계승권자인 안나 야기엘론카와 결혼하여 왕위의 정당성을 확보해야 했으나, 대관식을 치른 지 1년도 되지 않아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폴란드를 떠나버렸다.
약 1년 반의 공위 시대(interregnum)가 지난 1575년 12월 12일, 세임은 교황 대사의 설득에 따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를 국왕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사흘 뒤인 12월 15일, 재상 얀 자모이스키와 표트르 즈보로프스키를 비롯한 귀족(슐라흐타)들은 이에 강력히 반발했다. 이들은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 군주가 폴란드에서 반종교개혁을 강행하고 왕권을 강화할 것을 우려했으며, "피아스트의 왕", 즉 폴란드인의 왕을 선출하라고 요구했다.
격렬한 논의 끝에, 귀족들은 안나 야기엘론카를 폴란드 '왕'으로 선출하고, 당시 트란실바니아 공이었던 스테판 바토리와 결혼시키기로 결정했다. 바토리는 프로테스탄트와 소치니파(반삼위일체파)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이들은 종교적 자유가 보장된 트란실바니아의 통치자였던 바토리에게 호의적이었으며, 합스부르크 가문의 종교 정책에 불안감을 느꼈다. 바토리는 또한 선거 자금으로 20만 플로린을 제공하고 타타르족에게 잡힌 폴란드 포로들의 몸값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2] 이 선거 과정에서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대표들은 참석하지 않아 국왕 선출에 관여하지 못했다.
안나는 1575년 12월 13일 바르샤바에서 폴란드 국왕 및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선출되었다. 1576년 1월, 바토리는 트란실바니아 공위를 동생 크리스토프 바토리에게 넘기고 폴란드로 향했다. 1576년 5월 1일, 스테판 바토리는 안나 야기엘론카와 결혼하고 그녀와 동등한 지위인 폴란드 국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즉위했다. 이로써 1576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왕 선거가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바토리의 즉위는 순탄치 않았다. 특히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대표들은 자신들이 참여하지 않은 선출 과정이 루블린 연합의 규정을 무시한 것이라며 바토리를 대공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여러 양보를 요구했다.[7] 리투아니아 측은 안나 여왕의 영지를 리투아니아 재무부에 반환하고, 세임 회의를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에서 번갈아 개최하며, 리투아니아의 최고 정부 관직을 리투아니아인에게 맡길 것을 요구했다. 바토리는 이 조건들을 수용했다.[7]
결국 1576년 6월, 바토리는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정식 인정받았으며, 루테니아와 사모기티아 공작 칭호도 함께 얻었다.[14] 리투아니아 귀족들의 요구를 수용하고 대공으로서의 권위를 다지기 위해, 바토리는 1579년 빌뉴스에 예수회가 운영하는 빌뉴스 아카데미(훗날 빌뉴스 대학교)를 설립했는데, 이는 연방 내 세 번째 종합대학이었다.[14] 또한 1580년 5월 29일에는 빌뉴스 대성당에서 주교 메르켈리스 기에드라이티스로부터 교황 그레고리 13세가 축성한 축복받은 칼과 모자를 받는 의식을 거행했는데, 이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주권을 상징하는 동시에 루블린 연합 이전의 관례에 따라 리투아니아 대공의 별도 추대를 요구했던 리투아니아 귀족들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었다.[8][9][10] [11] [12]
4.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통치
1576년 5월 1일, 스테판 바토리는 안나와 결혼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으나, 그의 통치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국가는 공위 기간의 혼란으로 약화되어 있었고, 먼저 국왕으로 선출되었던 황제 막시밀리안 2세는 자신의 왕위를 주장하며 국내 반대파를 선동하고 러시아 차르국과 동맹을 맺어 군사적 압박을 가하려 했다. 다행히 막시밀리안 2세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면서 직접적인 왕위 계승 위협은 사라졌다.
리투아니아 대공국 역시 처음에는 바토리를 대공으로 인정하지 않고 여러 조건을 요구했다. 리투아니아는 안나의 영지를 리투아니아 재무부에 반환하고, 세임(의회) 회의를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서 번갈아 개최하며, 리투아니아의 고위 관직은 리투아니아인에게만 맡길 것을 요구했다. 바토리는 이 조건들을 수용했고,[7] 1576년 6월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정식 인정받았다. 그는 리투아니아 대공으로서의 권위를 보이기 위해 1579년 빌뉴스에 연방의 세 번째 대학인 예수회 빌뉴스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바토리의 왕위 계승에 가장 강력하게 반발한 세력은 프로이센의 단치히(그단스크)였다. 한자 동맹의 주요 도시였던 단치히는 막대한 부와 강력한 요새를 기반으로, 비밀리에 덴마크와 막시밀리안 2세의 지원을 받으며 바토리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단치히 반란이 발생했고, 1577년 바토리의 군대는 단치히를 포위했다(단치히 포위전). 6개월간의 포위 끝에 단치히 군대는 야전에서 패배했지만, 바토리 군대 역시 도시를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결국 양측은 협상을 통해 타협에 이르렀다. 바토리는 단치히의 특별한 지위와 기존의 특권(그단스크 법)을 재확인해주었고, 단치히는 바토리를 폴란드의 주권자로 인정하며 사죄의 의미로 20만 금 굴덴을 지불했다. 이후 단치히는 연방에 충성을 다하며 전쟁 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578년에는 프로이센 공국의 게오르크 프리드리히로부터 봉건적 충성 서약을 받으며 북부 지역의 통치권을 공고히 했다.
국내 통치 기반을 다진 바토리는 왕권 강화를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재상 얀 자모이스키가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그의 가장 신뢰받는 조언자가 되었다. 바토리와 자모이스키는 협력하여 왕관령에 대한 과세를 강화하고, 확보된 재정을 귀족(슐라흐타)들에게 빌려주며 지지 세력을 확보했다. 바토리는 여러 개혁을 단행했는데, 특히 사법 및 군사 분야에 집중했다.
교육 분야에서는 앞서 언급한 빌뉴스 대학교 설립 외에도 여러 예수회 학교 설립을 지원했다. 종교적으로는 가톨릭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했지만, 연방의 종교적 관용 전통을 존중하여 폴란드 유대인을 보호하고 모든 형태의 종교 폭력을 비난하는 법령을 발표하기도 했다.
대외적으로 바토리는 강력한 동맹을 통한 평화 유지를 추구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을 불신했지만, 교황청의 중재를 통해 황제 루돌프 2세와 군사 동맹을 맺고 기존의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남쪽의 오스만 제국과는 1577년과 1579년에 휴전 협정을 맺어 일시적인 안정을 확보했다. 이러한 외교적 노력은 동쪽의 러시아 차르국과의 전쟁에 집중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바토리는 헝가리인이었기에 헝가리 정치에도 계속 관심을 두었으며, 말년에는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의 지지 아래 안토니오 포세비노와 협력하여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헝가리를 해방시키고 폴란드-헝가리 연합 국가를 세우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으나, 국제 정세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다.[13] 그는 헝가리어와 라틴어에 능통했고 이탈리아어와 독일어도 구사했지만, 폴란드어는 배우지 않았다. 사생활에서는 검소했으며 사냥과 독서를 즐겼다고 전해진다.
4. 1. 러시아와의 전쟁 (리보니아 전쟁)
러시아의 이반 4세(이반 뇌제)는 스테판 바토리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리보니아 지역을 침공하며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이는 연방의 국경 지역을 침범하는 행위였으며, 이로 인해 발발한 리보니아 전쟁은 스웨덴, 덴마크-노르웨이 등 주변 강대국까지 끌어들인 국제적 분쟁으로 확대되었다. 1577년까지 이반 4세는 리보니아 대부분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나,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1578년부터 연방군은 스테판 바토리의 지휘 아래 반격을 시작하여 리보니아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며 러시아군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이는 전쟁의 흐름을 바꾸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스테판 바토리는 당시 대법관이자 그의 최측근이었던 얀 자모이스키와 함께 직접 군대를 이끌고 러시아를 상대로 결정적인 원정을 펼쳤다. 1579년에는 폴로츠크를 탈환했고, 이듬해인 1580년에는 벨리키예 루키를 점령하며 승세를 이어갔다.
1581년, 스테판 바토리는 러시아 본토로 더욱 깊숙이 진격하여 8월 22일, 러시아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인 프스코프의 거대한 요새를 포위했다(프스코프 공방전). 당시 교황청에서 파견한 특사 안토니오 포세비노는 분쟁 조정을 위해 포위 중단을 요구했고, 혹독한 겨울 날씨와 지휘관들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스테판 바토리는 포위를 계속했다. 결국 도시 함락의 위협을 느낀 이반 4세는 1581년 12월 13일부터 협상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협상 결과, 1582년 1월 15일 얌 자폴스키 화약(Peace of Jam Zapolski)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매우 유리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러시아는 폴로츠크와 벨리즈, 그리고 리보니아 공국의 점령지 대부분을 연방에 할양해야 했다. 대신 러시아는 연방군이 점령했던 벨리키예 루키와 네벨 지역을 돌려받았다. 이로써 스테판 바토리는 리보니아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며 연방의 영토를 동쪽으로 크게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5. 외교 및 대외 관계
스테판 바토리는 대외 관계에서 강력한 동맹을 통해 평화를 추구하는 정책을 모색했다. 그는 합스부르크 가문을 신뢰하지 않았지만,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서방 이웃 국가들 간의 전통적인 우호 관계는 유지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가 사망한 후, 교황대사의 중개를 통해 그의 후계자인 루돌프 2세와 군사 동맹을 맺었으나,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불신은 여전했다.
남동부 국경의 오스만 제국과의 긴장 관계는 1577년 11월과 1579년 4월에 체결된 평화 조약 및 휴전 협정을 통해 일시적으로 완화되었다.[13] 바토리는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의 승인과 교황 특사 안토니오 포세비노의 협력을 받아, 잘 조직된 기독교 군대(주로 폴란드군)를 통해 오스만 헝가리를 해방시키고 자신의 통치 아래 강력하고 독립적인 헝가리-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을 창설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당시의 불리한 국제 정세로 인해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13]
루스 차르국과의 관계에서는 리보니아 전쟁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1578년 바르샤바에서 소집된 세임을 설득하여 전쟁 자금을 확보한 바토리는 이반 4세가 이끄는 러시아군에 맞서 직접 군대를 지휘했다. 그는 벨리키에 루키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했으며, 1581년 8월 22일에는 러시아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인 프스코프를 포위했다(프스코프 공성전). 교황 특사 포세비노의 중재 요구와 혹독한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포위를 지속한 끝에, 1582년 1월 15일 얌 자폴스키 화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을 통해 러시아는 폴로츠크를 할양하고 리보니아 점령지 전부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반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리보니아 전쟁 이후, 바토리는 동부 국경 방위를 위해 오스만 제국을 공동의 적으로 삼아 루스 차르국과의 군사 동맹을 추진했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가 급격히 약화되어 동란 시대를 맞이하면서 이 군사 동맹은 실현되지 못했다. 또한 러시아의 차르 표도르 1세를 바토리의 후계자로 삼아 폴란드-리투아니아-모스크바 연방을 설립하려는 구상도 있었으나, 1586년 12월 12일 바토리가 흐로드나 고성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
바토리는 이러한 외교 활동 과정에서 오스만 제국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그의 야심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의심을 뛰어난 외교 수완으로 해소하기도 했다.
6. 죽음과 유산
스테판 바토리는 1586년 12월 12일 흐로드나 고성(현 벨라루스 흐로드나)에서 급사했다. 그의 유해는 동유럽에서 최초로 검시 부검을 받은 사례가 되었다. 유해는 처음에 흐로드나에 매장되었으나, 나중에 폴란드 크라쿠프의 바벨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약 1년간의 공위 기간을 맞이했다. 차기 국왕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2세의 동생인 막시밀리안 대공이 일부 세력에 의해 선출되었으나, 스테판 바토리의 아내 안나 야기엘론카의 조카이자 스웨덴 왕자인 지그문트 3세 바사가 이에 반발했다. 결국 지그문트 3세는 비치나 전투에서 막시밀리안을 격파하고 연방의 새로운 통치자가 되었다.
스테판 바토리가 사망한 직후, 연방 내에서는 그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했다. 많은 귀족들은 그가 사무엘 즈보로프스키를 처형한 사건이나 여러 국내 정책을 통해 귀족들의 특권인 황금 자유를 억압하고 절대 군주제를 강화하려 한다고 의심했다. 또한 그가 연방의 다른 민족들보다 헝가리인들을 더 편애한다는 불만도 제기되었다. 그는 헝가리식 모자와 샤블라(szabla)라 불리는 검(바토루프카, batorówka)으로도 사람들에게 기억되었다.
그러나 폴란드가 독립을 상실한 폴란드 분할 시대인 19세기에 들어서면서 그의 강력한 통치와 군사적 성공이 재조명받기 시작했다. 존 밥티스트 알베르트란디, 예지 사무엘 반트키, 미하우 봅르진스키, 유제프 슈이스키 등 많은 역사가들이 그를 유능하고 강력한 통치자로 높이 평가했으며, 동시대인의 평가처럼 그의 위업은 리투아니아 대공 비타우타스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여겨지기도 했다.[15] 일부 역사가들(타데우시 코르존, 요아힘 레레벨, 젱제이 모라체프스키)은 좀 더 신중한 평가를 내리기도 했지만, 1887년 역사가 빈센티 자크르제프스키는 바토리가 "폴란드 여론과 폴란드 역사가 모두가 사랑하는 인물"이라고 언급할 정도로 긍정적인 평가가 주류를 이루었다.
제2 폴란드 공화국 시기에는 국가적 영웅으로 숭배되었으며, 당시 폴란드의 실권자였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와 비교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공산주의 정권 하의 폴란드 인민 공화국에서는 그의 내부 정치나 헝가리에 대한 애착 등이 다시 논쟁거리가 되기도 했지만, 대중적인 역사가 파베우 야시에니차와 같은 인물들의 긍정적인 서술에 힘입어 그의 좋은 이미지는 대체로 유지되었다.
스테판 바토리는 자신의 통치와 업적을 기록하고 선전하기 위해 생전에도 역사 논문에서 시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품을 후원했다. 얀 코하노프스키, 미코와이 젭 샤르진스키와 같은 당대 문인들의 작품에 등장했으며, 이후 폴란드 문학사에서 야쿠프 야신스키, 유제프 이그나시 크라스제프스키, 율리안 우르신 니에므체비치, 헨리크 제부스키 등의 시, 소설, 드라마에서 중요한 인물로 꾸준히 다루어졌다. 얀 마테이코와 스타니스와프 비스피안스키를 포함한 많은 화가들이 그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그를 기리는 기념물도 여러 곳에 세워졌다. 이탈리아 파두아에는 1789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마지막 국왕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의 후원으로 조반니 페라리가 제작한 바토리의 조각상이 있다. 폴란드 바르샤바의 와지엔키 궁전에는 1795년 앙드레 르브룅이 만든 기념물이 있으며, 우크라이나 스니아틴에도 1904년에 기념물이 세워졌으나 1939년에 파괴되었다. 그는 빌뉴스 대학교(한때 스테판 바토리 대학교로 불렸음)와 1919년부터 1939년까지 폴란드군의 여러 부대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그의 이름은 20세기 폴란드의 유명 여객선인 MS 바토리와 TSS 스테판 바토리에도 사용되었다. 현대 폴란드에서도 그의 이름은 바토리 제철소, 비정부 기구인 스테판 바토리 재단, 폴란드 제9 기갑 기병 여단 등 여러 기관 및 부대 이름뿐만 아니라 수많은 거리와 학교의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실레시아의 초르주프 시에는 그의 이름을 딴 '바토리'라는 지역도 있다.
7. 평가
스테판 바토리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역사상 중요한 군주로 평가받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시대와 관점에 따라 다소 차이를 보인다.
동시대인들은 그의 위대한 업적을 리투아니아 대공 비타우타스(Vytautas)에 견줄 만하다고 평가하기도 했다.[15] 그러나 그가 사망한 직후, 연방 내에서는 긍정적인 평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많은 귀족들은 그가 사무엘 즈보로프스키를 처형한 사건이나 국내 정책들이 귀족의 황금 자유를 억압하고 절대 군주제를 확립하려는 의도라고 의심했다. 또한, 그가 연방의 국민보다는 자신의 출신지인 헝가리인들을 더 편애한다는 불만도 제기되었다. 그는 특징적인 헝가리식 모자와 검(폴란드어: szabla batorówka)으로도 사람들에게 기억되었다.
바토리에 대한 평가는 폴란드가 독립을 잃었던 폴란드 분할 시대인 19세기에 들어서면서 크게 달라졌다. 그는 리보니아 전쟁 등에서의 군사적 승리로 재조명받았고, 존 밥티스트 알베르트란디, 예지 사무엘 반트키, 미하우 봅르진스키, 유제프 슈이스키 등 많은 역사가들에 의해 유능한 통치자로 칭송받았다. 물론 타데우시 코르존, 요아힘 레레벨, 젱제이 모라체프스키처럼 좀 더 신중한 평가를 내린 역사가들도 있었다. 1887년 빈센티 자크르제프스키는 바토리가 "폴란드 여론과 폴란드 역사가 모두가 사랑하는 인물"이라고 언급할 정도로 그의 위상은 높아졌다.
제2 폴란드 공화국(1918-1939) 시기에는 높이 평가받았으며, 당시 폴란드의 실권자였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와 자주 비교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공산주의 정권 하의 폴란드 인민 공화국에서는 그의 내부 정치와 헝가리에 대한 애착 등이 다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이미지는 유지되었다. 특히 대중적인 역사가 파베우 야시에니차의 긍정적인 서술이 이러한 이미지 유지에 기여했다.
스테판 바토리는 생전부터 자신의 업적을 알리는 데 적극적이어서, 역사 기록이나 시 등 다양한 작품 제작을 후원했다. 그 결과 얀 코하노프스키, 미코와이 젭 샤르진스키 등 당대 문인들의 작품에 등장했으며, 이후에도 야쿠프 야신스키, 유제프 이그나시 크라스제프스키, 율리안 우르신 니에므체비치, 헨리크 제부스키 등의 시, 소설, 드라마에서 중요한 인물로 다루어졌다. 얀 마테이코나 스타니스와프 비스피안스키 같은 유명 화가들도 그를 주제로 한 그림을 남겼다.
그를 기리는 기념물도 여러 곳에 세워졌다. 이탈리아 파두아에는 1789년 조반니 페라리가 제작하고 폴란드의 마지막 국왕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가 후원한 조각상이 있으며, 바르샤바의 와지엔키 궁전에는 1795년 앙드레 르브룅이 만든 기념물이 있다. 스니아틴에도 1904년에 기념물이 세워졌으나 1939년에 파괴되었다.
그의 이름은 빌뉴스 대학교(과거 스테판 바토리 대학교로 불림)와 1919년부터 1939년까지 폴란드군의 여러 부대, 20세기 폴란드 여객선 두 척(MS 바토리, TSS 스테판 바토리), 바토리 제철소, 비정부기구인 스테판 바토리 재단, 폴란드 제9 기갑 기병 여단, 그리고 폴란드 내 수많은 거리와 학교의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초르주프 시의 한 지역 이름도 그에게서 유래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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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His official titles were ''Stephanus Dei gratia rex Poloniae et magnus dux Lithuaniae, Russiae, Prussiae, Masoviae, Samogitiae, Kiioviae, Voliniae, Podlachiae, Livoniaeque, necnon. princeps Transylvaniae.'' in Lat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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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no.khoz.r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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